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진출: 제국의 확장과 탐험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로의 팽창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진 대규모 영토 확장과 탐험의 역사다. 이는 경제적 동기, 자원 개발, 그리고 지정학적 전략이 얽힌 과정으로, 중앙아시아 스텝을 넘어 태평양과 북아메리카까지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 알래스카 탐험을 중심으로 약 5000자 분량으로 그 과정을 살펴본다.
시베리아로의 팽창: 러시아 제국의 첫걸음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이반 4세(1533~1584)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이반 4세는 카잔 칸국(1552)과 아스트라칸 칸국(1556)을 차례로 정복하며 중앙아시아 스텝으로의 문을 열었다. 1554년, 시베리아 원주민들로부터 항복을 받은 러시아는 우랄 산맥을 넘어 미개척지로 진출을 시도했다. 약 20년 후인 1570년대, 러시아인들은 타타르 칸 쿠축(Kuchuk)의 수도 시비르를 점령하며 시베리아 진출을 공식화했다.
1579~1584년의 대규모 침략으로 시비르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러시아인들의 중앙아시아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족 거주 지역으로 이동, 60년도 안 되어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다. 주요 정착지로는 1604년 오브강 연안의 톰스크(Tomsk), 1632년 야쿠츠크(Yakutsk), 1638년 오호츠크(Okhotsk), 1648년 캄차카(Kamchatka), 1651년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쿠츠크(Irkutsk), 1666년 아무르강 유역의 알바진(Albazin)이 건설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앵글로색슨의 아메리카 서부 개척과 달랐다.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 인디언이 대규모로 몰살되었지만,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인과 원주민 간 혼혈과 혼인이 흔했고, 사회적 차별도 제한적이었다. 러시아 중앙 정부는 원주민과 러시아인을 차등 없이 관리했으며, 시베리아 진출은 군사적 정복보다는 생업을 위한 자연스러운 이민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민 증가에 따라 정부는 자원 개발과 통치를 강화하며 시베리아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만주 제국과의 충돌과 네르친스크 조약
시베리아 팽창이 가속화되던 17세기 초, 만주족의 청나라(1639년 건설)가 중원에 등장했다. 청나라는 내몽골을 흡수하며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 1644년 중원 통치를 확립했다. 강희황제는 울란바토르(당시 우르가) 티베트 종교 지도자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며 몽골족을 흡수했고, 1691년 몽골족은 공식적으로 청나라에 항복했다. 청나라는 몽골 통치를 위해 종교 정책을 도입, 랏사에서 오는 몽골인들에게 적용했다.
러시아와 청나라의 동시적 스텝 확장은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갈등은 16세기 후반 표면화되었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양측은 중앙 및 북부 스텝의 영향력 범위를 규정했다. 이 조약으로 몽골족은 대부분 청나라 통치 아래 들어갔으며, 이는 1907년 청나라 멸망까지 이어졌다.
알래스카 탐험: 표트르 대제의 야망
15~17세기 초, 서유럽이 해양 탐험에 열중할 때 러시아는 유럽에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1682~1725)의 서구화 정책으로 러시아는 17세기말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표트르 대제는 시베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중국으로 통하는 북동항로와 아메리카 식민지 획득에 주목했다. 그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아나디르 수로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을 탐험에 투입했다.
베링의 1차 탐험: 베링 해협의 발견
비투스 베링(1681~1741)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활동하다 1703년 러시아 발트해 함대에 합류, 1724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베링에게 아나디르 수로 탐사를 명령하며 해군 복귀를 지시했다. 1725년 1월, 베링 탐사대는 페트로그라드를 출발, 육로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 1728년 3월 캄차카 반도 동해안에 도착했다. 두 달간 배를 건조해 6월 9일 가브리엘 호를 완성했다.
베링은 아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을 통과해 북극해로 진출했으나, 짙은 안개로 알래스카를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아시아 대륙의 끝을 확인했다고 판단, 1730년 3월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하며 준장(Captain-Commander)으로 진급했다. 이 항해로 발견된 해역은 베링해, 해협은 베링 해협으로 명명되었다.
베링의 2차 탐험: 알래스카 발견과 비극
1733년 3월, 안나 여제 치세에 베링은 2차 탐험을 시작했다. 1737년 오호츠크에 도착한 탐사대는 세인트 피터 호와 세인트 폴 호를 건조, 1741년 6월 4일 탐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6월 12일 악천후로 두 배가 분리되었다. 치리코프의 세인트 폴 호는 알류샨 열도를 발견하며 1741년 10월 귀환했지만, 베링의 세인트 피터 호는 알래스카만으로 떠밀려 8월 20일 남서해안과 알류샨 열도를 정찰했다.
5개월간 바다를 떠돈 베링 탐사대는 바위투성이 해안에 좌초되었다. 11월 말, 세인트 피터 호는 폭풍으로 파괴되었다. 북극권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탐사대원들이 사망했고, 베링은 섬인지 육지인지 확인을 위해 정찰대를 파견했으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1741년 12월 8일 사망했다. 정찰대는 12월 26일 이곳이 섬임을 확인, 베링 섬으로 명명했다. 살아남은 탐사대는 부서진 배 조각으로 새 배를 만들어 1742년 8월 캄차카로 귀환했다.
알래스카의 운명과 러시아의 유산
알래스카는 모피 산지로 개발되었으나, 러시아 재정 악화로 1867년 720만 달러에 미국에 매각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진출은 경제적 생존과 자원 개발에 뿌리를 두었다. 시베리아에서는 원주민과의 융합으로 자연스러운 확장이 이루어졌고, 알래스카 탐험은 베링의 헌신으로 북아메리카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네르친스크 조약과 베링의 탐험은 러시아 제국의 지정학적 야망과 탐험 정신을 보여주며,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는 러시아의 글로벌 영향력을 확장한 역사적 무대로 남았다.